퀵메뉴버튼 퀵메뉴버튼 최상단으로 가기

위대한 유산

비단처럼 곱게

뻗어 나가는 예술의 숨결

남원

남원의 예술에는 경계가 없다. 사람들의 강인한 생활력과 애환은 소설가의 펜을 놓지 못하게 만들었고, 낭만 가득한 풍경 아래 태어난 사랑 이야기는 누군가를 노래하게 했다.
이 선율에 또 다른 누군가는 붓을 들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감이 되는 곳, 남원의 예술을 말한다.

오로지
글을 쓰기 위한 삶

최명희

글. 최재봉 한겨레 문학전문기자 그림. 김옥

맷돌을 얹어 놓은 것처럼 답답한 가습은 일어나 앉아 보아도 술을 내쉬어 보아도 내려가지 않는다. 그 맷돌의 무거움은 가슴에 고인 신물의 무게 같기도 하고, 걸려있는 한숨의 무게 같기도 하였다. 아니면 그것은 서러운. 사랑, 강모의 이름이었는지도 모른다.
『혼불』 중에서

최명희(1947-1998)는 『혼불』의 작가다. 단행본으로 10권, 원고지 1만 2천 매 분량의 대하소설 『혼불』은 일제강점기 말 전라도 남원 매안마을을 배경으로 무너져 가는 ‘매안 이씨’ 종가를 지키는 종부(宗婦) 3대와 이씨 문중 땅을 부치며 살아가는 상민마을 ‘거멍굴’ 사람들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최명희는 전주에서 태어났지만 본적은 『혼불』의 무대인 남원시 사매면이다. 지금 작가의 출생지인 전주에는 최명희문학관이, 남원에는 혼불문학관이 각각 들어서서 독자를 맞고 있다.
최명희는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쓰러지는 빛」으로 등단했고 이듬해 <동아일보> 장편소설공모에 『혼불(제1부)』이 당선되었다. 『혼불』은 2~5부가 1988년부터 1995년까지 월간지 <신동아>에 연재되었고 1996년 12월에 전 10권으로 완간되었다. 1부를 쓰기 시작한 1980년부터 치자면 햇수로 17년이 걸린 이 소설은 어디까지나 미완성이었다. 작가는 해방은 물론 그 뒤의 1950년대, 1960년대까지도 마저 쓰고 싶었으나 건강 문제 때문에 일단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혼불』은 청암부인이 양자로 들인 조카 이기채의 아들 강모와 사촌 여동생 강실의 근친상간, 상민 춘복에 의한 겁간과 임신, 일제의 징병을 피한 강모의 만주행 등을 굵직한 줄거리로 삼아 전개된다.

그러나 소설은 사건을 중심으로 속도감 있게 진행되지 않고 한없이 느리고 유장하게 이어지며, 작가는 자주 본 줄거리를 벗어나 곁가지를 치며 한껏 해찰을 부린다.
“너도 종부가 되었으니 내 말을 잘 들어라. 대저 종가란 무엇이냐. 우리 조상 저 윗대 아득하신 현조 이래로 그 어른의 장자에 장자로만 이어 온, 한 가문의 맏이 집안이 곧 종가이니라.” 『혼불』 제3권에서 청암부인이 손부(손자며느리) 효원에게 하는 말이다. 열아홉 새파란 나이에 청상이 되었음에도 ‘내 홀로 내 뼈를 일으키리라’라는 다짐대로 손수 집안을 일으켜 세운 자부심과 책임감이 느껴진다. 이런 청암의 모습에서는 어쩐지 작가 최명희의 면모가 겹쳐 보인다. 최명희야말로 민족 언어와 민족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책임감으로 자신을 갈아 넣다시피 하며 『혼불』을 쓰지 않았겠는가. 『혼불』에서 작가는 잊혀져 가는 순우리말과 한자어를 적극 되살리고, 필요할 경우에는 사전에 없는 말도 만들어서 쓸 정도로 모국어에 대한 애정과 열정을 한껏 보여 주었다. 제목으로 쓰인 ‘혼불’부터가 사전에 등재돼 있지 않은 말인데, 작가에 따르면 전라도 일대에서는 흔히 쓰는 말이라고 한다. 혼불은 몸 안에 있는 불덩어리로, 사람이 죽으면 그 몸에서 빠져나간다. ‘목숨의 불, 정신의 불, 삶의 불’이 곧 혼불인데, 작가는 일제의 지배 아래 신음하는 민족의 처지를 혼불의 위기 상황으로 파악한 것이다.

작가는 병으로 숨을 거두기 불과 1년여 전에 국립국어연구원의 초청을 받아 그곳 직원들을 상대로 강연을 하면서 자신이 『혼불』을 쓸 때 적절한 어휘를 찾느라 고심한 과정을 들려주었다. 주인공 강실의 아련하고 안개처럼 고운 자태에 어울리는 ‘아리잠직하다’라는 낱말, 청암부인을 두고 쓴 ‘지견(知見)이 풍연(?衍)하다’라는 표현, 절에서 들리는 저녁 종소리를 묘사한 ‘강 강’, 얼었던 강이 풀리는 소리를 나타내고자 스스로 만들어 쓴 ‘소살소살’ 등…. 『혼불』은 이런 언어의 조탁과 함께 복색과 음식, 관혼상제, 세시풍속, 노래 등 풍속의 꼼꼼한 묘사에서도 남다른 성취를 보여 주었다.

“쓰지 않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때때로 나는 엎드려 울었다.” 『혼불』의 성취가 탁월한 만큼 그를 위해 작가가 들인 에너지는 엄청난 것이었을 터. 때로 엎드려 울었다는 고백 앞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쉰둘 이른 나이로 숨을 놓을 때까지 자신을 갉아가며 『혼불』 집필에 혼신을 다한 작가 최명희. 우리는 그를 문학의 순교자라 불러도 좋으리라.

함께 들어요

QR코드에 접속하면
최명희 작가의
『혼불』을 읽어 드립니다.

우리의 영원한 춘향

안숙선

글. 윤하정 문화칼럼니스트 그림. 김옥

‘남원’ 하면 바로 『춘향전』이 떠오른다. 그래서 남원을 찾는 여행객들은 성춘향과 이몽룡이 처음 만나 사랑을 맺은 광한루부터 들르곤 한다. 남원을 대표하는 향토문화축제 역시 ‘춘향제’다. 올해로 92회째 이어진 춘향제에서는 크게 춘향제향, 전국춘향선발대회, 대한민국춘향국악대전을 치른다. 전국춘향선발대회에서 해마다 수많은 춘향이가 배출되고 있지만, 우리에게 가장 사랑받는 ‘영원한 춘향’은 안숙선 명창이 아닐까.
판소리는 몰라도 안숙선이라는 이름은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그만큼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진 최고의 소리꾼 안숙선 명창이 최근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춘향가’ 보유자가 되었다. 이미 여러 차례 판소리 5바탕(춘향가, 흥보가, 심청가, 수궁가, 적벽가)을 완창하고 60여 년의 국악 외길에서 수많은 무대를 선보인 그녀가 선택한 소리는 ‘춘향가’였다. 안 명창과 춘향의 각별한 인연 때문일까.

춘향이와 동편제의 고장인 전북 남원은 안숙선의 고향이기도 하다. 소리꾼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9세 때 이모인 가야금 산조 강순영 명인의 권유로 국악을 시작했고, 초등학교 졸업 후에는 남원국립국악원에서 소리를 배웠다. 특히 외숙부인 강도근 명창에게 우렁차고 힘 있는 동편제 소리를 배움으로써 일찌감치 소리꾼의 길을 탄탄하게 닦을 수 있었다. 1986년 남원춘향제 판소리 명창부 대통령상을 받으며 명창 반열에 올랐고, 앞서 1979년 입단한 국립창극단에서 이후 200편이 넘는 창극의 주역을 꿰차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맡았던 역할은 춘향이었다. 2003년 영국 에든버러 페스티벌 공식 초청 무대에서 7시간 동안 춘향가 완창(판소리 1바탕을 완주하는 것으로 3~8시간이 걸린다)을 선보이기도 했다. 안숙선이 ‘영원한 춘향’으로 불리는 이유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70대인 안숙선이 이제야 무형문화재가 된 것을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는 지난 1997년부터 국가무형문화재 가야금 산조 및 병창 보유자였다. 19세에 상경해 만정 김소희에게서 소리를, 향사 박귀희에게서 가야금 산조와 병창을 각각 사사했고, 이내 박귀희의 후계자가 되었다. 덕분에 가야금 명인으로 먼저 이름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국악인으로서 그의 궤적은 단연 판소리로 빛났다. 1986년부터 1991년까지 매년 판소리 5바탕을 완창했고, 1988년에는 프랑스, 영국, 독일 등 유럽 8개국 12개 도시에서 판소리 공연을 펼쳤다. 1998년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에 초청받기도 했는데, 그해 안 명창은 한국 전통예술인 가운데 최초로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을 받았다. 국내외에 국악을 널리 알린 공로로 1999년 옥관문화훈장에 이어 지난해에는 은관문화훈장도 받았다.
안숙선은 지난해 초 문화재청에 국가무형문화재 춘향가 보유자로 인정해 달라는 신청서를 제출했다.

문화재청은 ‘안 명창의 판소리 춘향가에 대한 전승 능력과 전승 환경, 전수 활동 기여도가 탁월하다.’고 밝혔다. 이번에 판소리 기능 보유자로 인정되면서 기존 가야금 산조 및 병창 보유 자격은 해제됐다. 두 분야를 중복해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 역시 ‘영원한 춘향’을 선택한 셈이다.
지난해 진행했던 안 명창과의 인터뷰는 자칫 부딪히면 부서질까, 쫑긋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이야기를 놓칠까 조마조마했던 기억이 있다. 연세가 있으니 건강이 중요한 이슈이기도 했다. 하지만 소리를 한 대목 부탁하자 아담한 체구에 어울리던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는 금세 생기를 머금고 옹골차게 뻗어 나갔다. 무대에서는 오죽하겠는가. 70대에도 아이돌 같은 일정을 소화하며 ‘영원한 춘향’으로 남을 수 있는 비결일 것이다. 2020년 남원에는 ‘안숙선 명창의 여정’이 개관하기도 했다. 안숙선 명창의 소리 인생을 들여다보는 것은 물론, 누구나 국악을 배우고 공연을 즐길 수 있는 남원의 또 하나의 명소가 되지 않을까 한다.

함께 들어요

QR코드에 접속하면
안숙선 명창의
‘사랑가’를 들려 드립니다.

생명을 그리는
화가

김병종

글.유치석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장그림 그림. 김옥

남원은 지리산 아래에 터를 이루고 섬진강과 합류하는 요천이 관통해 전국에서 손꼽힐 만큼 아름다운 자연 유산을 지니고 있다. 또한 판소리 동편제의 발상지이자 한문 소설 『만복사저포기』, 판소리 7바탕 중 춘향가, 흥부가, 변강쇠타령의 배경지로도 알려져 있다. 김병종 화백이 태어난 남원은 이처럼 풍부한 유·무형의 유산이 녹아 있다. 고향을 생각하면 보랏빛 자운영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들녘이 먼저 떠오른다는 그. 어렸을 적부터 판소리를 듣고 자라온 그가 자신의 예술 세계를 형성시킨 것은 7할이 고향의 정서라고 고백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김병종이라는 화명(?名)은 1988년에 발표한 <바보 예수> 연작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바보로 보일 만큼 착하기만 한’ 예수를 수묵화로 그려낸 이 작품들은 국내외에서 여러 이슈를 불러일으켰는데 특히 유럽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 동방에서 온 낯선 화가가 가져온 낯선 예수는 기존의 고정관념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그는 ‘올해의 미술기자상’을 수상했다.
<바보 예수>에 이어 김병종이 가져온 두 번째 화두는 생명이었다. 1989년 생사를 오가는 위급한 경험에서 체득한 생명의 가치를 화폭에 옮긴 것이다. 생명의 노래, 생명을 예찬하는 그림들이다.

이 그림들은 우리네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과 숲속의 왕성한 생명력으로 충만하다. 특히 <화홍산수>는 화면 중심에 그려진 붉은 꽃에서 생명의 온기가 느껴진다. 작가는 《생명의 노래》라는 큰 타이틀로 30년 넘게 작품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진행형이다. 생명의 씨앗이 노오랗게 퍼지는 <송화분분>, 바람에 흔들리는 <풍죽>처럼 생명의 소재도 다양해졌다. 이어령(1934~2022)이 김병종을 ‘생명의 동행자’라고 말한 이유이다.
최근 김병종은 남원에 450점의 대표작과 5천 점 이상의 자료와 도서들을 기증했다. 자신의 어릴 적 경험으로 비추어 고향의 어린이들이 여전히 예술적 자양분을 얻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안타까움 끝에 내린 결심이었다. 이 기증을 바탕으로 2018년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이 건립되었다. 미술관은 개관 후 채 5년이 되기도 전에 20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다녀갔고, 한국관광 100선에도 선정될 만큼 시민들에게 벅찬 사랑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 김병종의 그림들이 지닌 파급력이 크다. 그의 작품들은 매우 현대적이면서도 한국적인 여운과 정서를 내포한다.

코발트색 아크릴 물감으로 친 난(蘭) 줄기처럼. 영국 대영박물관과 캐나다 로열 온타리오 뮤지엄에서 그의 작품을 소장한 이유도 현대적이면서 한국적인 독특한 정서와 물성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중국 시진핑 주석, 미국 펜스 전 부통령처럼 국빈들의 내방 선물로 김병종의 작품이 전달되기도 했다.
여기 한 소년이 있다. 광한루 앞 고목에 기대어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옆을 지나가던 어른들에게 “고놈 참 잘 그리긴 하는데…. 그러다 굶어 죽는다!”라고 핀잔받던 이 소년은 어느새 성장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가가 되었다. 그리고 고향의 후배들을 위해 아낌없이 내주었다.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고 불릴 만큼 다양한 유·무형 유산이 혼재한 남원이라는 숲에 김병종은 시각예술이라는 또 다른 씨앗을 뿌렸다. 우리는 그 씨앗의 발아를 기다릴 뿐이다.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은 개관 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9월 2일부터 “김병종 40년, 붓은 잠들지 않는다” 4부작 특별전을 1년 동안 진행할 예정이다. 김병종이 말하는 생명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오셔서 보시길.

함께 들어요

QR코드에 접속하면
김병종 화가의
「화첩기행」을 읽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