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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 속의 바다

이별이 내게 알려준
사랑이란

글. 양수진 장례지도사 그림. 신진호

문득 사람 간의 해원(解寃)을 꼭 죽어서만 할 게 아니라, 살면서도 한 번쯤 해본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후를 위해 연금에 저축하는 것처럼, 죽음을 위해 인간사의 여한을 남기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다. 잘살기 위해 채워 가듯, 잘 죽기 위해선 비워야만 한다. 사랑만 하기에도 짧은 인생, 질책하고 미워해서 무엇하랴. 결국엔 차갑게 식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후회하게 될 것을.

누군가 나에게 많은 직업 중 왜 하필이면 장례지도사 일을 하냐고 물어오면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머리를 긁적이며 우물쭈물하고 있으면 혹시 돈을 많이 벌기 때문이냐고 재차 묻는다. 단언컨대 나는 이 일을 하면서 고수익을 손에 쥐어 본 적이 없다. 일말의 기대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일을 해서 눈먼 돈을 주머니에 몰래 넣을 수 있는 시절은 이미 끝난 지 오래다. 설사 그런 기회가 찾아왔다 하더라도 슬쩍 챙길 만한 두둑한 배짱도 없다. 수입도 별 볼 일 없는 데다 사회적으로 명예를 떨칠 수 있는 직업도 아니라면, 도대체 왜 하고 있는 것일까? 나도 그 사정에 대해 딱히 심도 있게 고민해 본 적은 없었다.
“그냥 미래에 비전이 있다고 생각이 들어서요. 적어도 정년 때까지는 잘릴 걱정 없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잖아요. 고령화 사회로 인하여 사망자 수는 계속 증가할 테고, 그에 따라 장례에 대한 수요도 늘어날 것이고….”
틀린 말은 아니지만 사실 이것도 결정적인 이유라곤 할 수 없다. 내가 이 일을 선택한 까닭에는 보다 철학적인 사색이 기초했다. 사람은 왜 태어났으며, 결국 어디로 가는가. 이런 물음은 인류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래 뚜렷한 정답을 내리기 어려운 수수께끼다. 나 역시 답은 찾지 못했다. 그러나 경쟁과 탐욕의 안개에 가려져 희박했던 ‘산다는 것’의 의미를 조금 더 분명하게 만들 순 있었다. 오직 그것만으로도 나의 오늘은 충분히 빛난다.
남들이 보기에 어둡고 음침한 곳에서 눈에 띄지 않게 자행되는 죽음의 변주라 여길 수 있지만, 그곳에야말로 날것 그대로의 회한과 사랑이 있다. 지금도 도심 속에 ‘장례식장’이란 간판이 보이면 인근 주민들이 항의를 한다.
집값이 떨어질 것을 우려해서다. 아침에 장의차를 보면 재수가 좋다고 흔히 하는 말들도, 결국 내심 불길한 감정을 전도시키려는 술책에서 나온 말이 아닐까. 삶과 죽음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임에도, 유독 죽음만은 터부시되고 있다. 상실을 부정하고 싶은 지극히 인간적인 마음에서 기인한 현상이겠지만, 삶을 완성하는 힘은 죽음에 대한 소중한 자각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장례 절차 중 특히 입관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영광이라 생각한다.
심장이 멈춰버린 육신이 땅으로 하늘로 흩어지기 전, 마지막 인사라는 데에 의의가 있기도 하지만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감정의 응어리를 모두 해소할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곱게 수의를 입혀 드리고 난 후 영면에 잠긴 고인과 한쪽 구석에 모여 흐느끼고 있는 가족들에게 말한다.
“자. 이 자리를 빌려 아버님에게 정말 감사했는데 표현하지 못하신 게 있거나, 서운하셨던 게 있다면 이쪽으로 다가와 말씀드리고 모두 털어 버리십시오. 그리고 아버님께서도 모든 근심 걱정과 아픔 다 내려놓으시고 가볍게 훨훨 날아가십시오.”
이 순간이 되면 서러운 울음과 함께 명치에 얹힌 듯 맺힌 그리움과 슬픔이 모두 빠져나가는 기분이 든다. 긴 세월 응어리진 덩이가 고작 한마디의 운으로 말끔하게 해소되긴 힘들겠지만, 조금이나마 마음의 짐을 덜어 고인을 온전히 그리워할 여유 공간을 마련해 주는 셈이다. 이런 모습들을 거듭 보며 문득 사람 간의 해원(解寃)을 꼭 죽어서만 할 게 아니라, 살면서도 한 번쯤 해본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후를 위해 연금에 저축하는 것처럼, 죽음을 위해 인간사의 여한을 남기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다. 잘 살기 위해 채워 가듯, 잘 죽기 위해선 비워야만 한다. 사랑만 하기에도 짧은 인생, 질책하고 미워해서 무엇하랴. 결국엔 차갑게 식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후회하게 될 것을.
사랑하는 연인을 앞에 두고, 내가 왜 이 사람을 사랑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단번에 떠오른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한다. 나는 지금까지도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명확한 이유를 댈 수 없다. 일의 성과 여부를 떠나, 일을 하고 있지 않은 순간에도 머릿속에 그것이 떠나질 않는다면 그건 사랑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좋은 곳에 갔을 때 사랑하는 이의 얼굴이 떠오르듯, 일도 그렇게 사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축복일까. 내가 일하는 공간에는 통곡과 절규의 소리가 적지 않게 사무치지만, 그 울림 안에서 지혜를 얻으려 한다. 지금처럼 매 순간 감사하고 사랑하며 내 위치에서 묵묵히 정진하다 보면, 끝내 피할 수 없는 죽음과 조금이나마 친숙해질 수 있으려나.
육신의 부패보다 빠른 것은 정신의 망각이다. 떠나간 사람은 언젠간 잊힌다. 실존에서의 소멸보다 더욱 두려운 것은 기억 속에서 잊혀진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고인들과 그 이야기들을 결코 잊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진실로 보여준 죽음의 단상들을 통하여 지금의 내가 보다 성숙해질 수 있었다. 또한 이 상실의 아픔과 감동적인 순간들을 누군가 공감해주고 귀 기울여 준다면 내게는 큰 위로가 될 것이다.